남성의 성적 환타지로 조각된 여성의 육체라는 주제의 영화는 많다. 은교도 그중 하나일거라 생각하며 선입견을 갖고 보았는데 예상외로 좋았다. 마케팅의 실패라고 해야할까? 요즘 영화 홍보 트렌드가 '노출'이긴 하지만 이 영화는 맥을 잘못 짚은듯 하다..
아무튼, 은교의 다리에 누워 꿈인듯 봄으로 돌아간 적요, 그 환상 속의 파릇한 박해일은 참 아름다웠다.
순수한 이미지, 부드러운 인상.. 뭐 이런걸로 박해일에 대해 말하곤 하는데
나는 그것보다 그의 눈빛 속에 청춘이 읽힌다. 청년의 눈빛. 그 빛나는 푸르름이 좋다.
적요의 시선을 따라 그렇게 영화를 본 후, 돌아오지 않을 청춘에 대한 갈증, 그 애틋한 갈망의 눈빛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가 사랑한건 어린 여고생의 육체적 아름다움보다 더 깊은 생명의 싱싱함. 그 싱그러움, 자신에게도 있었던 그 생명력의 기억.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그는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봄을 바라보는 영혼과는 반대로 겨울의 등나무 껍질처럼 말라 쪼그라진 육체는 인간에게 형벌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노인이 되는 그 순간까지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만은 간직하고 싶다. 청춘과 노쇠의 경계에서 고뇌한다 해도, 영혼만은 푸른빛이고 싶더라...
다만... 감독은 적요가 은교를 사랑했던 것만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다. 도대체 그 파격노출이 뭔지... 홍보 내내 떠들어대던 것도 마음에 안들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보니 문제가 되던 세가지 장면. 박해일의 전라씬과 은교의 체모노출, 그리고 은교와 서지우의 정사씬일텐데. 앞의 두가지는 납득이 되었고 작품 속에 필요한 장면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정사씬은 필요는 했더라도 과했다는 느낌?
문득 다른 이야기이지만,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천일의 약속>이 떠올랐다. 자존심 쎄고 도도한, 작가였던 여주인공 이서연이 알츠하이머 병에 걸리고 점점 그녀가 그토록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추락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서연이 어디까지 무너질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김수현 작가는 그녀가 나락의 끝까지 추락하기 직전에서 멈춰섰다. 사람들은 엔딩에 관해 말들이 많았지만, 난 김수현 작가의 이서연이라는,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아리도록 도도했던 이서연의 자존심을 지켜줬음에 감사했다.
그렇게까지 보여주지 않아도 됐다. 적요의 노쇠함과 그의 갈증을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조롱하지 않아도 그는 충분히 처참했을텐데 말이다..
마지막 적요의 말..
"잘가라, 은교야.."
그 말이 마치 "잘가라, 나의 청춘이여.. 내 싱그럽던 그날들의 기억이여.."로 들렸다.
문득, 나의 뮤즈를 찾고 싶어졌다. 나는 나의 뮤즈를, 그를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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