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난 왜그리 진심이 없어?"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2년여를 사귀었던 애인과 헤어진 후 모임에 나갔을때,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 한 질문.

 

"그럼 무얼 바란게냐? 질질 짜면서 술이라도 벌컥벌컥 마셔주길 바란게냐?"

 

요즘같이 금방 만나고 금방 헤어지는 세상에서 2년이라면 나름 오래 사귄 사람일진데 그런 사람과 헤어진지 일주일도 안되서 웃고 즐기고 놀 수가 있느냐... 뭐 이런 의미였다. 누가 먼저 찼느냐, 차였느냐의 문제를 떠나 '이별'이라는 크나큰 사건(!)을 겪은 여인으로써 좀 더 차분하고 자중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하는 걸까.

 

이미 서로의 합의하에 두 사람이 헤어졌다. 감정의 정리는 빨라야 하고 이별에 대처하는 슬기로운 자세 중 눈물은 바보스럽다. 그 사람은 그가 가야할 길로 난 내가 가야할 길로 각자 떠났다. 무엇이 더 남을건가. 사람을 만나고 감정을 쌓고 사랑하는 동안, 그 기간동안의 정성과 배려, 애틋함.. 그 기간동안만 충실하면 된 것 아닌가. 인연을 정리하는데에도 순서가 있고 예의가 있다고 한다. 그게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이별한 후 그 추억을 더듬어보고 회상하며 마치 누군가의 장례식을 치루는 것 처럼 엄숙해야만 하는 것일까.

 

담백하게 사랑했고 이별 후 감정의 잔재가 남지 않을만큼 깨끗하게 털어부어주었다. 이별 후 남은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없기 때문에 채워넣을 공간만이 남았다. 슬프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좀 더 진지한 이별의식을 해야만 했을까.

 

언젠가 사랑은 영원하다, 사랑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등등의 순정에 대한 동경을 한 시기가 있었다.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생겨버렸는데 그 이후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어오거나 생각하게 되는건 너무나 부끄러운 짓이라며 억지로 이미 닳아빠진 나의 감정을 붙잡고 매달렸었다. 첫사랑과 이별한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였는데 말이다.

 

난 새로운 사랑에 패배했다. 내가 동경하던 그 단 한번의 사랑이라는 감정이 결국 새로운 사랑에 무릎꿇고 사라져버렸다. 난 나 자신을 자책했다. 부끄럽고 한심했고 어리석게 여겼었다. 어떻게... 어떻게 내가 진심이라 느끼는 사랑이 둘이나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난 진심도 순정도 없는 그런 아이였단 말인가...

 

약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2번째 사랑은 3번째 사랑에게 무릎을 꿇었다.

 

예상치 못하게 거듭되는 감정의 변화를 겪을때마다 난 괴로워해야했고 드라마나 영화 혹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아주 유치한 멘트로 이별을 고해야만 했다.

 

"미안해,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 정말 미안해..."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마치 대단하게 큰 배반이라도 한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내가 내뱉은 이별에 괴로워하며 앞서 말한 이별의 의식을 단단히 치뤄댔다. 마치 그렇게라도 해야만 내 같잖은 죄책감이 줄어들 것만 같은 기분?

 

그런데 어느 해인가, 어느 날인가.... 단단한 눈빛과 그보다 더 단단한 심장을 가진 이를 만나 1년이 넘는 기간동안 어지간히도 가슴앓이를 했다. 생과 사를 오가는 고통을 겪으며 사랑했다. 병이 왔고 원형탈모에 머리가 하얗게 새었고(실제로 새치가 엄청나게 났다-_-) 눈물을 흘릴 기력조차 내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사랑을 하였다. 내가 숨쉴 수 있을만큼의 기력만 남겨놓고 쏟아부었다. 다시 돌아가라면 절대 하고 싶지 않을만큼의 진절머리나는 사랑이었다. 그렇게 난 하루하루 죽어갔고... 어느 날 아침, 눈을 뜸과 동시에 읊조렸다.

 

"그만해도 되겠다...."

 

그리고 이별을 고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죽는 것 보단 낫군..."

 

그랬다. 죽는 것 보단 나았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내 심장은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렇게하면 되는구나... 매 순간 충실히 사랑하고 줄 수 있는만큼의 사랑을 모두 털어부으면 이별 후에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있구나. 죄책감 따위 갖지 않아도 되는구나....

 

누가 먼저 헤어짐을 고하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동안 얼마나 후회없이 사랑하였느냐가 중요한 것이구나 라는 것. 남김없이 쏟은 후에, 더이상 남은 것이 없을때엔 헤어져도 괜찮은 것이구나.. 라고.

 

내 기억속 마지막 이별을 했던 그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해주지 못한게 너무 많은데 미안해서 잡지도 못하겠다... 잡아도 떠나겠지만 부디 아프지 말고 나보다 좋은 남자 만나.."

 

이미 난 괜찮았다. 내 사랑이 진실했음을, 아낌없이 남김없이 사랑했음을 그도 알고 나도 알았기에 우리의 이별은 담백했고 간결했다. 죄책감이나 속죄의 의식없이도 이별은 가능했다.

 

연인을 저울질하는 이들이여, 먼저 차야하나, 차여야 하나와 같은 어줍잖은 고민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돌아보라. 후회없이 사랑하였는지. 몇년 후 낯선 거리에서 그(그녀)를 만났을때 미안하지 않을만큼 사랑하였다면 그만 놓아주어도 된다. 죄책감없이 고갈된 사랑을 아쉬워하는 정도의 이별이면 된다.

 

남김없이 사랑하자, 모두가 두려워하는 이별 앞에 당당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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