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를 다친지 10년하고도 몇 해가 더 흘렀다.
외형상으론 큰 문제가 없지만 한쪽으로만 숨쉬기도 불편하고
예전에 비해 코가 좀 못나지기도 했는데 어째 더 내려앉는 기분도 들고.
이젠 더 미루기 힘들 것 같아 그냥 수술하려고 한다.
각종 검사는 이미 다 받았고 곧 날짜 잡는다.
난 사실, 이 코만 생각하면 매우 화가 난다. 아주 오독오독 씹어먹고 싶은 그놈이 생각나서. ㅠ..ㅠ
스무살때,
강도를 만났다.
당시의 난, 학교를 휴학하고 공무원 시험센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 꿈이 뭔지 등등에 대한 개념이 잡혀있지 않았던 때였고
미술을 전공했지만 그건 말그대로 어려서부터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길로 가야할 것만 같아 연명하듯 이어갔던 공부였을 뿐.
암튼, 그렇게 몇개월의 시간이 비었고 그때부터 난 혼자 자취를 시작하게 됐다.
내 손으로 돈도 벌어보고 싶었고 그러면서 하고싶은 꿈이 뭔지, 내 미래에 대한 생각도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첫 사회생활.
재미있었다. 힘들 사이도 없이 선배들 도움 받으며 보람차게 한달을 마치고 드디어 월급날.
당시만해도 (2000년 경?) 적지 않았던 60만원이라는 돈을 지폐로 받고
회사 사람들과 씐나게 월급맞이 음주가무도 즐기고 집으로 돌아간 그 시간이 대략 밤 10시 경.
골목 슈퍼도 불이 훤했고 집집마다 불빛이 짱짱했던 시간.
다만 내가 자취하던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엔 가로등이 좀 어두운데다 좁은 골목이라 살짝 으슥한 곳이었다.
그래도 얼마 안되는 거리라 총총대며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등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뭔가 뒷목이 싸해지는 것이 직감적으로
'아.. 뭔가....' 싶었던 찰나,
갑자기 커다란 손이 내 입을 틀어막고 내 몸이 위로 들려올라갔다.
내 키가 좀 작다. -..-;;;
어찌나 힘이 쎈지 바둥바둥대는 내 발이 땅에 닿질 않았다.
이 놈이 날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데 난 사력을 다해 !!!-..-!!! 그놈의 손을 할퀴었다.
지도 아팠는지 슬쩍 내 입을 막은 손에 힘이 풀리고
난 그냥 막 그놈의 손을 물고 할퀴고 비명을 지르고 이대로 끌려가면 진짜 뭔가 큰 사단이 날 것만 같아서.
맘처럼 안되는걸 느꼈던지 그놈은 나를 바닥에 던져놓고는 사정없이 내 얼굴에 주먹질을 해댔다.
그리고 가방을 빼앗아 달아났다.
내 월급날인걸 알았냐? -_-;
가져갈거면 곱게 빼앗아 갈 것이지, 내가 힘이 쎄봤자 지를 어떻게 이긴다고.
얼핏 기억으로는 손가락에 커다란 금반지를 끼고 있었고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리며 사정없이 주먹질을 하던 놈.
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은 못봤지만 20대 정도 되는 놈이었다.
하긴, 그 난리발광으로 돈 뺏기고 얼굴만 맞고 끝난게 다행이지.
만약 끌려갔었으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글 못쓰고 있었을지도.
암튼 기다시피 해서 주인집에 가니 주인 아줌마, 아저씨를 비롯한 그집 식구들 멘붕. =ㅂ=;;;
거울을 보니 인간의 몰골이 아니었다.
눈은 무슨 온라인 게임 몬스터처럼 흰자위가 시뻘겋고
입술은 찢어져 피철철.. 퉁퉁 부어오르고
코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만큼 뭉개지고 온 얼굴이 피칠갑.
옷에도 피투성이.
머리는 귀신산발.
말그대로 메두사 =_=.. 내 몰골에 등골이 오싹했다. 거의 헬급 몬스터 수준이었다.
근데 신기한게..
그날 밤동안부터 며칠간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경찰이 왔었고 '우리 관할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 매우 죄송하나, 잡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성의없는 대답을 던져두고 간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응급실을 갔었는지, 내가 병원에서 잤는지 집에서 잤는지조차 기억에 없다.
기억이 훌쩍 넘어 모자를 눌러쓰고 아르바이트하던 회사에 가서 당분간 못나올 것 같다고 얘기한 것 밖에.
외상후스트레스장애라는게 이런거겠지.
암튼,
지금이야 십수년이 지나 이렇게 이모티콘 섞어가며 썰을 풀어대고 다 지난 일처럼 얘기하지만
이 일이 남긴 후유증은 생각보다 크다.
일단 그날 이후로 난 밤 12시 이후엔 슈퍼도 안간다.
음주가무로 빛났어야 할 나의 20대, 클럽은 사건 이전 두어번 친구들과 갔던게 전부고 -_-
혹시나 야근이나 작업 등의 이유로 밤늦게 들어가야 하는 날이면 콜택시를 불러 집앞까지 갔고
그게 어려웠던 곤궁하던 시절엔 그냥 게임방에서 밤을 샜다.
(그리하야 나는 우리나라에 서비스 된 대부분의 MMORPG 게임을 섭렵할 수 있었다. ㅋ)
물론 자취는 계속 했지만 이사가는 집엔 내 돈을 들여 방범창 공사를 새로 해야 했다.
다른 상처를 모두 아물었지만
13바늘이나 꿰맸던 입술엔 티나진 않지만 얼핏 보면 예쁜 -_- 굴곡이 생긴 것과
가장 큰 문제로 남은 코.
외형상으로도 이전보다 좀 낮아지고 코 안쪽으로 휘어진 뼈가 만져진다.
한쪽으로 숨을 쉬니
살면서 잠이 늘 없고 좀 느리고 신경은 예민하고 두통이 잦은 이런 상태.
수술비도 고작 50만원 가량에다 입원이 필요치도 않은 수술이라는데 아직까지 미뤄왔던 이유는 단 하나.
ㅠ.ㅠ 무서워서...
성형이 당연시 되는 세상, 난 그 흔한 반영구 시술조차 안해봤다.
다른곳도 아니고 얼굴에 칼을 댄다는게 진짜 오금저리게 무서워서..
그냥 이렇게 살다 가야지 하며 생각않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친척분 소개로 학교 동기셨다는 압구정의 모 성형외과에서 레이저 피부관리를 받게 되었다.
차마 얼굴에 레이저 쏘는 것까지 무섭다고 피할 수는 없는지라
이번주까지 4회차인데
해보니 내가 생각보다 통증에 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아프세요?"
"그냥.. 솜털 뽑는 기분인데요."
"오! 이것도 아프다는 분들 많으신데 잘 참으시네요."
-.-...?
그래서 내친김에 해버리자는,
별 시덥잖은 계기로
그 성형외과 원장님의 소개를 받아 명동의 코수술로 유명하다는 이비인후과에서 검사를 완료했다.
그냥 두면 점점 더 심해져 한쪽 코로는 숨을 못쉬게 될거라고, 꼭 해야한다고.
다행히 알러지 반응 검사은 모두 이상무.
난 어쩌면 생각보다 꽤 괜찮은 체질의 소유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힛..
그리하야..
피부관리가 모두 완료되는 4월 경에 수술을 하기로 했는데 후기가 헬급이다. ㅜ..ㅜ
코안을 마취하고 휘어진 코뼈를 들어내서 망치로 와다다다닥 맞춘다음 다시 끼우고
코안에 주먹만한 솜뭉치를 집어넣는데 눈코입에서 피가 쏟아지고 코로 숨도 못쉬고
잠도 못자고 거의 수술 당일부터 며칠은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고.
도대체 난 아무것도 잘못한게 없는데
왜! 10년이 넘은 이제까지 그 사건의 후유증에 피해자인 내가 시달리고 있는지,
진짜 약이 올라도 이렇게 오를 수가 없다.
그러면 뭐하나, 이미 지나간 일.
남겨진 숙제는 내 몫인걸.
안아프게 해주세요. ㅠㅠ
안아프게 해주세요. ㅠㅠ
안아프게 해주세요. ㅠㅠ
안아프게 해주세요. ㅠㅠ
안아프게 해주세요. ㅠㅠ
안아프게 해주세요. ㅠㅠ
안아프게 해주세요. ㅠㅠ
진쫘...
두려워요...
그런 기분이다.
외나무 다리에서 앞에는 디아블로 뒤에는 안타라스가 지키고 있는 기분.
전진도 후퇴도 안되는 이 뭣같은 상황.
그래, 나는 내 인생에 벌어진 숙제를 용감히 수행하기 위해 수술대 위에 오르마.
야, 60만원! 너는 한여름에 선풍기도 못 쐴 신세로 120년만 살다 가라!!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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