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1
나는 내내 쓸쓸하였다.
사는동안 누군가와 함께 라는 충만한 감정이라는걸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다.
비단 가족관계나 남녀관계에서 느껴지는 결핍의 문제는 아니었다.
내 기억의 첫 조각을 더듬어 올라가보자면,
엄마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고 있는 나였고
왠지 드문드문 찾아와 더 반가웠던 것 같은 아빠,
두 사람의 싸움,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났던가,
엄마의 선배라는 여자의 집은 작은 다락방이 달린 단칸방에 내 또래 아이가 셋 넷은 더 있었다.
그 집에 맡겨진, 더부살이 다섯살배기. 그게 나였다.
아줌마와 배우 임채무씨를 꼭 빼닮은 그의 남편은 아침이면 일을 하러 나갔고
또래 아이들과 난 하루종일 덩그러니 방안에서,
티비를 보고 차려놓은 초라한 밥상에 밥을 먹고 하릴없이 싸워대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나 혼자 있을 수 있었던 곳은 온갖 짐들이 켜켜이 쌓여 먼지가 풀풀 날리던 작은 다락방.
다락방에 난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며
오늘이면 엄마가 올까, 내일이면 올까... 기다리고 기다렸다.
이런저런 상상들로 시간을 채우고 있자면 저녁이 되고 아줌마 아저씨는 피곤에 지친 얼굴로 돌아와
아이들을 잡아댔다.
나도, 그 화살을 빗겨갈 순 없었다.
무슨 잘못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다섯살의 난, 재례식 부엌 연탄 아궁이 옆에 쳐박혀 연탄집게로 맞았다.
서럽다는 감정이 어떤건지, 사람들은 제대로 알고 말하는 것일까.
나는 참으로 서러웠다. 그러나 누굴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방법도 몰랐던 난,
그저 기다렸다.
엄마가 와주기를..
그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늦은 밤, 엄마가 찾아왔다.
푸른 빛이 골목에 드리워질때이니
아마 새벽일지도.
난 엄마, 이모와 함께 택시를 타고 외갓집을 갔고
나는 목놓아 울며 가지말라며 엄마를 붙잡았다.
그리고 또다시 덩그러니 남은 나.
엄마의 식구들은 외할아버지와 막내이모를 제외하곤 모두 나를 미워했다.
큰 언니의 신세를 망친 못된 놈의 자식이라고.
그 놈을 꼭 빼닮은게 나였으니까.
꽤 그럴싸한 외갓집에서 난 유치원도 다녔고 밤이면 막내이모와 함께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라디오도 듣고
그림도 그리고 제법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건 표면적인 생활수준의 정도일 뿐.
나는 화장실에 앉아서도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종교가 뭔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티비에서 하느님에게 빌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배웠던 것 같다.
작은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다.
엄마를 오게 해달라고.
엄마와 함께 살고 싶다고.
외할아버지는 부동산을 하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아침에 모두 출근하고 본인도 외출할때 늘 문을 잠궈뒀다.
나는 또 혼자가 된채로 집안에서 자잘한 사고들을 쳤다.
어느날인가,
막내 삼촌 책상 서랍에서 오백원짜리를 가지고 집을 빠져나왔다.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봐야 군것질을 하고 문구점에서 잡다한 무언가를 샀던 것 같다.
그날 저녁, 외할머니는 회초리를 들고 무섭게 나를 혼냈다.
나는 끝까지 안가져갔다고 우겨댔다.
가져갔다고 말하면 못된 놈의 자식이 못된 짓을 했다는 그 소리를 들을게 두려웠던 걸까,
아니면 이곳에서도 쫓겨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감정이 상한다는 말,
나는 외할머니가 내게 얼마나 잘해주셨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훗날 엄마는 외할머니가 내게 베푸셨다는 애정에 관해 전해들었지만
내 기억속 외할머니는 회초리를 들고 잡을듯 나를 나무라는 그 모습 뿐이다.
외할아버지는 늘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밥을 먹여주셨다.
내가 심심해 할라치면 찐감자에 설탕을 뿌려주셨다.
무료한 낮시간 몰래 집을 빠져나와 부동산에 놀러가면
500원짜리 동전을 쥐어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할머니가 찾아왔을때 미련없이 그녀의 무릎에 앉아 함께 가겠다고 했던건
이미 어린 나의 감정 어딘가에 생채기가 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부산으로 갔다.
엄마가 아닌 아빠의 손을 잡게 되면서 이 운명이라는게 참 재미있게 뒤틀린다.
애정결핍, 히스테리, 자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 욕심, 삐뚤어진 사랑의 전형인 우리 할머니.
자식이라면 껌뻑 죽을 정도로 죽고 못살아 하면서도
자신을 놀래켰다는 이유로 여섯살 아이의 따귀를 때리는 여인.
지나고 생각해보자면,
할머니도 우울증이었을게다 싶다.
열아홉에 글쟁이 남편 만나 아들 하나 낳고
역마살에 술에 쩔어 전국을 돌아다니는 남편을 기다리며 살다..
그 남편이 젖먹이 아들만 남겨두고 치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온갖 궂은 일에 술장사까지 하면서 키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징그러운 아비 피를 물려받았는지 예술이랍시고 음악한다고 돌아다니다
그래도 멀쩡한 집안 여자와 결혼한다 했을땐 마음을 좀 놓았었겠지.
그러면 뭐하나, 몇년 살지도 못하고 혹만 하나 붙이고 끝나버린걸.
그 혹은 이제 자신이 감당해야할 몫으로 남고...
우울하지 않으면 그게 정상이 아니지.
그녀에게도 왜 살면서 로맨스 한번이 없었겠는가.
살아보니 알 수 있는, 그 뜻대로 안되더란 이유가 있었으니 이제껏 혼자겠지.
그래도...
내 유년시절에,
엄마, 아빠도 제 갈길 가겠다며 이리저리 던져뒀던 나를,
짧게나마 행복하게 해준건 그녀 뿐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유채꽃밭을 달리고 나비를 잡고 개구리를 잡고
무화과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따고
저녁이면 멀리서 밥먹으라며 부르는 그 동화같은 장면이
내게도 있었다.
일요일이면 할머니와 교회를 가고
교회 앞 개울에서 물장난을 하고
어느 집 담벼락에 드리워진 함박꽃이나 길가에 코스모스를 꺾어 가져오기도 하고
여름날이면 가게 아가씨 언니들과 유원지도 가고....
그땐 할머니도 지금과 같지 않았다.
할머니에 대한 내 가슴의 앙금이, 아직도 풀어지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지만
그때는, 그때만큼은 그녀도 품이 넓은 여자였다.
아빠가 왔고 여자 하나가 따라왔다.
대한민국 탑배우의 조카라는 그녀는 참 예뻤다.
나를 데려가겠다고,
아빠와 새엄마와 함께 살자고.
할머니는 그래도 할머니보단 아빠가 낫겠지 하는 심정으로 나를 보냈을 것이다.
나도, 그럴줄 알았다.
유원지 달세방.
새엄마가 내게 호의를 베푼건 딱 하루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엄마와 아빠는 자고 있었고
배가 고파 새엄마를 깨우면 동전을 주며 빵을 사먹으라고 했다.
그러다 빵이 아닌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는걸 들킨 날,
나는 또다시 맞았다.
아빠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가위질을 하다 내복에 구멍을 냈다는 이유로 낚시대로 맞았고
소변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추운 겨울 욕실에서도
다섯살의 나도 맞았고
일곱살이 된 나도 맞고 있었다.
그녀는 겨우 이십대 중반의, 어린 여자였다.
음악하는 잘 생긴 오빠와 연애하게 된건 좋았을지 몰라도
그 오빠에게 달린 혹은 좋지 않았을거라 그리 생각한다.
그녀가 임신을 했고
내게 여동생이 생겼다.
나는 부산으로 다시 보내졌다.
택배상자처럼,
여기서 저기로, 저기에서 또 다른 곳으로.
보내는 사람의 뜻에 따라 여기저기 전달되고 반품되고...
할머니의 가게가 잘 안되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제일 먼저 레코드를 켜고 아빠 노래를 듣는 낙이 있었는데
그 낙도 끝이 났다.
초등학교 2학년,
할머니와 함께 부산을 떠나 아빠, 새엄마, 여동생과 살게 됐다.
그때부터,
할머니가 변했고
아빠는 그런 할머니를 미워했고
새엄마와 여동생은 아르헨티나로 떠났고
나는 꾸역꾸역
살았다.
가끔 엄마가 오겠다는 전화를 받는 날이면,
동네 어귀 슈퍼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아
노을이 질때까지 기다렸다.
100도 세어보고 1000도 세어봤다.
혼자 두손을 모으고 엄마를 보내달리는 기도도 했다.
엄마는 늘 오지 않았다.
기대와 기다림, 실망, 눈물..
그리고 아빠와 할머니의 전쟁 틈바구니에서,
그렇게 나의 조각난 유년시절은 흘러갔다.
나는 내내 쓸쓸하였다.
단 한번도,
나의 쓸쓸함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써내려가 보니,
(이건 거의 배설 수준의 글질이다..)
나는 내내 죽고싶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다.
물론 몇번, 문득 그런 생각과 시도가 없었던건 아니지만
그저 대부분은 쓸쓸함 정도에서 타협할 수 있었다는 것.
그거면 됐다.
나는 징그러운 부계의 피를 받아
하필이면 그중에서도 할아버지의 재주를 물려받아
글쟁이로 산다.
나의 정신적 성장의 쾌거..
그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내 연장통을 채워주었다고 생각하는 시기까지 왔다.
이 얼마나 바람직한 결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 늘, 내내 쓸쓸할 것만 같다.
이젠 할머니와의 앙금 정도가 남았을 뿐이고
그렇게 기다리던 엄마도 지척에서 왕래를 하고
아빠도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며 살고 있고
원하는 일을 하며
그다지 어렵지 않게 '나만 잘하면 되는' 아주 전형적이고 바람직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아직도 내 가슴엔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엄마를 보내달라 기도하는 다섯살짜리 계집애가 있다.
이 아이를 어떻게 달래줘야 할까.
어떻게 다독여줘야 아이의 기도가 끝이 날까.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